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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의 리더십(미국 제40대 대통령)

Stockage 발행일 : 2022-08-12

버나드 맬라머드는 언젠가 한 야구선수의 이야기를 다룬 내추럴(The Natural)이라는 소설을 썼다. 그 책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했던 영화는 수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 속에서 그는 물 흐르듯이 세상을 살아가며 팀 동료들처럼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지만 영화가 절정에 이른 순간 통쾌한 장외 홈런을 터뜨린다. 역대의 다른 대통령들과 확연하게 비교될 수 있는 그 같은 본능과 직관을 타고났던 테오도어 루즈벨트나 프랭클린 루즈벨트처럼 로널드 레이건은 정치에 있어서 바로 그런 내추럴(타고난 천재)이었다. 두 명의 루즈벨트처럼 레이건도 남들 눈에는 어려워 보이는 일들조차도 쉽게 처리하는 마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레이건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세부적인 아주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몽상적이거나 부주의한 경향이 있어서 드라마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는 또한 1920년대 이래 정책 자체에 대해 가장 무관심한 대통령이었다. 일상 업무에서는 참모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너무 컸고, 그 때문에 결국 큰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균형감각을 가진 연구자라면 그의 정책에 대해 찬성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가 아주 유능한 대통령이었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내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로 백악관의 가장 탁월한 리더를 꼽는다면 단연 레이건이다. 지도자의 척도는 얼마나 많은 흔적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다. 신경제를 도입한 대통령, 냉전 종식에 기여했던 대통령, 정부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이 나라의 태도를 변화시킨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로 그처럼 긴 흔적을 남긴 대통령이 레이건 외에 누가 있었겠는가?

 

결정적인 순간의 리더십

3월 초, 그가 대통령 집무실을 차지한 지 여덟 주가 안 되어 우리는 레이건의 입지가 급격하게 약화되기 시작했음을 감지했다. 아무리 그 같은 상황을 막으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허니문 기간이 끝나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1981330일 그에게 결정적인 전기가 찾아왔다. 이 결정적인 순간은 레이건 정권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그날 오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몇 블록 정도 떨어진 워싱턴의 힐튼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대통령이 저격을 당했다는 소식이 백악관으로 날아왔다. 세계의 모든 언론들은 그 사건이 발생하고 몇 분 안 되어 일제히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동시에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것이다.

 

비밀검찰부 요원 제리 파의 몸 아래 숨은 채로 대통령 전용 리무진을 타고 쏜살같이 조지 워싱턴 병원으로 후송되는 동안 레이건 자신도 총을 맞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가벼운 상처를 입어 갈비뼈가 약간 아픈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레이건은 자동차에서 나오면서 수행원들의 부축을 뿌리쳤고 본능적으로 상의 단추를 잠갔다. 그런 그의 모습은 대통령으로서의 감각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는 한 흐트러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나서 병원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쓰러지고 말았다. 총알이 심장 바로 옆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도 레이건은 물 흐르는 듯한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 그는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의사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당신이 철저한 공화당이길 바라오.” 또한 아내 낸시에게는 허니, 내가 고개 숙이는 법을 잊어버려서 총을 맞았나 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레이건 정권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국민들은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레이건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전과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근로 계층의 사람들에게 이제 그는 총탄 세례까지 받은 대통령으로 인식되었고, 국민들은 그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그는 국민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정책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심지어는 당장 몇 달 후에 경기침체가 찾아와 국민들 사이에 부정적인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조차도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헤밍웨이식으로 표현하여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도 품위를 보여 준 대통령이라는 그의 새로운 명성을 손상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취임 후 첫 7개월 동안 그는 말보다는 행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굳혔다. 국민들에게 일관성과 힘이 있는 고아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점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내적인 강인함을 갖고 있었으며, 국민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었다. 그는 용기가 있었고, 그의 말과 행동은 엄격한 원칙을 고수했다. 따라서 신념을 가진 지도자로 비춰질 수 있었으며,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핵심적인 신념체계에 대한 일관성

대부분 성공한 지도자들처럼 레이건도 집권 전에 이미 핵심적인 신념체계를 발전시켰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지만 수십 년간의 광포한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그 같은 신념체계를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그것은 진부하고 단순한 체계였지만 레이건은 여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신념을 갖고 있고, 그 신념을 고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최종 목적지에 이르는 방법은 유연하게 바꿀 수 있지만 지도자는 궁극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반드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레이건 또한 집권기간 8년 동안 잠시 노선을 바꾸기도 했지만 항상 확고한 방향성을 유지했다.

 

레이건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선택받은 나라다. 둘째, 미국은 일등이어야 한다. 이등은 허용될 수 없고, 어느 나라에게도 뒤져서는 안 된다. 일등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미국의 힘만이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 넷째, 미국은 국민들이 노력과 상상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을 때, 즉 최대의 자유를 보장받을 때 비로소 강해진다. 다섯째, 미국의 실험은 개인의 자유와 전통적인 가치의 배양이라는 두 가지에 의지하고 있었다. 레이건 역시 어린 시절부터 그 같은 가치를 호흡하며 자랐으며, 줄곧 그런 가치들을 고수해 왔다. 그렇지만 그런 가치들은 현대 사회의 삶에 의해 얼마나 많이 파괴되고 있는가? 그는 그 같은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레이건의 핵심적인 사상을 요약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들이 너무 친숙한 것이라는 점에서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1970년대 후반기의 관점에서 미국인들은 광포한 군중들에게 지쳤으며, 전통적인 가치의 회복을 열망하고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레이건은 그 같은 시대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대변해 주었다. 나아가 자신의 믿음을 일관되게 견지함으로써 사람들은 레이건 자체가 그 자신의 신념과 동의어라고 믿게 되었다. 사상과 개성이 융화됨으로써 지도자로서는 더없이 강력한 무기를 얻었던 것이다.

 
 

대중적인 의미를 재해석하는 탁월한 능력

케슬린 홀 제이미슨은 전자시대의 웅변이라는 책에서 당시에 내가 주목하지 못했던 레이건의 연설 내용을 크게 부각시켰다. 사실 오늘날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공동체적인 경험은 대부분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서 보는 시각적인 영상에서 비롯된다는 점이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레이건은 자신의 연설 속에서 그런 공통의 시각적 경험을 불러 내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 경험들을 다시 삶에 적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가미시켰다. 공보보좌관이었던 나는 레이건이 스크린에 나오는 스토리를 즐겨 얘기하는 것은 그의 배경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리고 제이슨의 분석을 접하고 나서야 나는 그 같은 접근법이 갖는 힘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해석의 달인으로 거대한 사건의 의미를 대중적인 의식에 맞추어 훌륭하게 재해석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가장 통렬한 예는 챌린저호 사건이었다.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는 19861월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발사된 직후에 공중 폭발했다. 탑승자는 여섯 명의 미국인과 우주비행을 위해 선발된 최초의 학교 선생님 크리스타 맥올리프였다. 맥올리프는 아이들을 위해 인간적인우주를 만들고 싶어했고, CBS뉴욕타임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40%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에서 생중계로 발사 장면을 시청했다고 한다. 전례 없이 생생한 화면으로 포착되었던 폭발 장면은 강력한 국민적인 슬픔을 촉발시켰다. 이에 레이건은 최고의 연설문 집필 보좌관이었던 페기 누넨과 함께 난국을 수습해 나갔다. 무엇보다 그는 어린 학생들을 위로해 주어야 했다.

 

“나는 이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이것은 탐구와 발견을 위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인류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를 잡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미래는 겁쟁이들의 몫이 아닙니다. 오로지 용감한 자들의 몫입니다. 챌린저호의 승무원들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고 있고, 우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라갈 것입니다.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승무원들은 그들이 살았던 삶의 방식을 통하여 우리를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그리고 그들을 보았던 마지막 순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주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손을 흔들며, 굳건한 대지를 차고 올라 하나님의 얼굴을 어루만졌던 이 아침을.”

 

그날 밤, 레이건의 연설이 재방송될 때 NBC는 그가 마지막 말을 하는 순간 손을 흔드는 챌린저호의 탑승인들의 모습을 방영했다. 그 같은 영상과 교전 중인 미국 전투기를 소재로 했던 존 길레스피 매기의 시 <고공비행>에서 차용한 구절을 짜 넣음으로써 그는 그들의 비행을 인간 승리의 순간으로 불멸의 생명을 주었다. 지도자는 국민적인 슬픔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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