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의 리더십(미국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은 그야말로 모순덩어리였다. 그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영민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인 동시에 가장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기도 했다. 클린턴은 전임 대통령들의 치세에 대해 탁월한 역사적 식견을 갖고 있었지만 역사적인 교훈을 경시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는 스스로 약속했던 것처럼 진정으로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행정부”를 만들려고 했지만 최초로 의회의 탄핵을 받은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로 민주당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었지만 트루먼 이후로 재임기간 중에 양원을 모두 야당에게 넘겨준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는 부인에게 애착을 갖고 매일 사랑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거듭해서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또한 클린턴은 오랫동안 그를 숭배하는 폭넓은 충성파 집단을 형성했고 자신의 동지들을 누구보다 잘 보살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는 사람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무자비하게 버리는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클린턴은 영원한 패러독스다. 그가 진을 거두고 먼지가 가라앉고 난 후에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며 숱한 추문에도 불구하고 처음 집권할 때보다 미국을 훨씬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놓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미국은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매우 실질적인 성장을 했다. 미국은 1990년대에 들어 20세기 중에 가장 밝은 시기를 맞았으며, 클린턴은 그 주된 동력 중에 하나였다. 그는 이런 점에서 영원히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권에 대해서는 쓰라린 실망감을 숨길 수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룩했든, 얼마나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든.
클린턴의 리더십과 실패의 원인
클린턴은 자신의 약점에서 영구적인 선거전 체계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윤리적 실책에 대해, 그리고 회피를 위해서도 거짓말을 했다. 기사의 사전조율에 대한 의존까지 더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일관된 맥락이 클린턴 시대를 관통해 왔다. 그것은 1998년 클린턴의 도덕적 권위가 붕괴됨으로써 끝이 났다.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관계와 뒤이은 거짓말들이 들통남으로써 지도력과 명분이 추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의회와 언론을 비롯한 다른 권력 중심으로부터 표출된 분노의 폭발은 또한 여러 해 동안 축적되어 왔던 강력한 반발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클린턴을 지지했고, 집권 2기의 클린턴에 대한 지지율은 심지어 레이건을 능가했지만 벨트웨이 사람들은 그에게 넌더리를 쳤다.
1960년대에 노이스탯이 했던 말이 정곡을 찌른다. 대통령의 힘은 대중적인 인기와 그리고 전문가적인 명성에 의존한다는 것. 통치를 하기 위해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하지만 또한 반드시 워싱턴 정가에서 명성을 얻어야 한다. 클린턴은 한 가지는 성취했지만 다른 한 가지는 그렇지 못했다. 그럼으로써 지도력을 상실한 것이다.
워싱턴 바깥에 사는 사람들은 워싱턴 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쉽게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반드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워싱턴에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일련의 이상을 갖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하거나 간에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또한 워싱턴은 본질적으로 한 마을이나 다름없으며, 단 하나의 기관, 즉 백악관만이 그 중심 광장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워싱턴 사람들은 자녀들이 자신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만큼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영예로운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새로 온 사람들이 터줏대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그들의 규칙을 깨려고 한다면 설사 그가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클린턴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다. 1998년 샐리 퀸이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했던 한 편의 기사는 클린턴 부부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 테지만 이러한 워싱턴의 정서를 잘 포착했다.
그녀가 인터뷰를 했던 백 명의 워싱턴 사람들 중에 백악관 출입기자단 대표인 데이비드 브로더는 이렇게 말했다. “클린턴은 이곳에 와서 그 자리를 망쳤고, 이곳은 그가 있을 곳이 아니다.” 국내 정치에 대해 클린턴에게 자문을 했으며, 널리 명성이 알려진 교수 출신의 빌 갤스턴은 또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 사람들의 대부분은 존경할만한 사람들이며, 옳은 일을 하려고 한다. 이들은 클린턴의 행동이 지극히 정상이고, 모든 워싱턴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비춰진다는 것은 평생 동안 갖고 있던 영예로운 공직생활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이 더렵혀지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여기에 더해 나는 워싱턴의 규칙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둥지를 더럽히지 말라.”
그의 정권을 돌이켜 보건대 클린턴은 자신을 위해서도 너무 일찍 대권을 얻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결심하고 내 집으로 전화를 걸었던 1991년 어느 날 밤, 그의 목소리는 결코 승리에 대한 확신에 차있지 않았다. 그 당시 클린턴의 계산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1992년에 있을 선거는 워밍업에 불과하고 먼 길을 가기 위한 티켓을 얻고 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았던 것은 확실하다. 틀림없이 그는 마리오 쿠오모가 민주당 후보지명전에 가세하면 쿠오모가 근소한 차로 승리를 하여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이고 최종 선거에서 부시에게 패배할 것이다. 그런 다음 1996년 선거전에서는 그 결과를 토대로 이런 논리를 구성했다. 먼데일과 마이클 듀카키스, 쿠오모, 이 세 사람의 후보가 구시대의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민주당을 연패로 몰고 간다. 이쯤 되면 신민주당 시대가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이미 공화당 대통령에 싫증이 났을 테고 그러면 자신이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되면서 국민들에게 구체적인 정치일정을 승인받을 수 있다.
그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었다면 그는 훨씬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1996년까지 클린턴은 내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4년이라는 시간을 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보다 튼튼한 지반 위에 설 수 있었을 테고 보다 자제력을 기를 수 있었을 것이며, 벼랑 끝으로 걸어 가려는 충동도 훨씬 잦아들었을 것이다. 아마 힐러리와의 관계도 훨씬 균형 있는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들의 사생활이 공적인 활동에 미치는 파멸적인 영향력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그는 대통령의 권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더 많은 고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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